유독 날이 포근했던 지난달,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와 대형 카페에 방문했었다. 카페는 그 규모에 걸맞게 입구부터 떠들썩했다. 들뜬 이야기 소리, 주문받는 알바생의 목소리. 불쾌하지 않은 소란이 일렁였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귓가에 오래 맴돌던 소리가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그런데 카페를 조금 누비다 보니 깨달았다. 그 티 없이 맑은 웃음소리는 출입구 쪽 한구석에서만 머물러 있다는 것을. 카페의 중앙에는 아이들이 넘어오지 못할 벽이 하나 있었다. 그 벽의 이름은 '노키즈존'. 누군가는 그것을 차별과 혐오라고 읽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공정한 권리라고 불렀다.

인터넷에서만 보던 차별을 자각하는 건, 내 일상에 그것이 이미 침투한 뒤였다. 카페에 있는 내내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이들은 비좁은 벽 한쪽에서만 머물렀다. 단지 한 번씩 야외 정원에 나가 뛰어놀 뿐이었다. 아이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카페가 얼마나 넓은지를. 그리고 노키즈존을 만든 어른들도 알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세상이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는 걸. 사회는 그렇게 아이들의 가능성과 경험을 단절시키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건 노키즈존뿐만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NO은 어느 곳에서나 숨쉬고 있었다. 그 대상은 정말 다양했다. ‘노교수존’, ‘40대존’, ‘노시니어존’, ‘20대존. 사회는 어느샌가 편리함을 이유로, 특정 대상에 대한 차별을 남용하고 있다. 구글 지도의 노키즈존맵에 따르면, 2020년을 기준으로 노키즈존의 수는 400여 곳 정도라고 한다. 또한, 202111, 한국리서치가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노키즈존은 타인에 대한 배려인가에 관한 여론을 조사했다. 그 결과, 74%가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수긍했다. ‘노키즈존이 어린이에 대한 차별이라고 답한 사람들은 29%에 불과했다. 실제 현대사회에서는 노키즈존을 찬성하는 의견들이 훨씬 우세한 편이다. 사람들은 정말 노키즈존을 정당한 권리이자 영업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들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나는 유년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작은 빌라였던 집은 좁디좁았지만, 집 밖의 세상은 무한하게 넓었다. 오백 원짜리 동전을 쥐고 찾아간 동네 빵집에서 나를 저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르막길 끝에 있는 미술관에서도 나를 내쫓는 사람은 없었다. 어릴 적 내가 바라본 세상은 무척 넓었다. 그리고 나는 늙은 나를 떠올렸다. 주름이 부쩍 늘고, 살이 군데군데 쳐졌겠지만,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 있을까. 아니다. 그때의 나도 여전히 친구들과 예쁜 카페에서 떠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어떤가. 과연 미래의 사회에서 늙은 나를 반길 곳이 있을까. 결코 그럴 리 없을 테다.

따라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나온 날들과 우리가 거쳐 갈 날들을. 혐오 없는 삶에서는 말한다. ‘아무리 우아한 이론을 가져와도 혐오는 혐오이고, 어떤 낙인을 갖다 붙여도 사랑은 사랑이다라고. 나의 권리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묵살하는 것은 엄연한 혐오다. 권리가 아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조금 더 부딪혀 봤으면 좋겠다. 기피하는 대상에 대해서 말이다. 본래 편견은 더 많이 접촉하고 더 가까이 있을수록 줄어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깨닫는 날이 올 테다. 더 나은 세상은, 혐오와 배척이 아닌 책임감으로부터 비롯됨을.

 
저작권자 © 경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